고백의 원형

남산드라마센터, <바후차라마타> 본문

빛나는 착각

남산드라마센터, <바후차라마타>

S.mi 2014. 10. 22. 16:08




정리가 야기하는 혼돈에 대한 고찰

- 남산예술센터의 2014 시즌 번째 프로그램, <바후차라마타: Beyond Binary>


  어떤 것을 가장 쉽게 파악하는 방법은 아마도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 익숙한 것들에 비추어 대상을 관찰하고 측정하여 이미 습득한 카테고리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곧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명명하고 유형화한다. 이러한 방식은 비단 사물이나 외부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인간에도 매우 빈번하게 적용되곤 한다. 그 중에서도 성별은 우리가 가진 유형화 방식 가장 엄격한 스케일을 가진다. 남과 , 개의 항목만을 정상적인 범주에 두고 있는 구별짓기는, 가장 명료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혼돈을 가지고 온다. 그것은 남과 여라는 개의 항목이 어느 정도의 통계적 오차 범위마저도 허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항적 세계가 짓누르고 있는 발밑의 현실에는 우리가 동안 미처 고려하지 않았던 다수(多數) 소수(少數)들이 존재한다. 마치 그들의 존재 자체가 혼돈의 원인인 ,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이항 대립적 세계의 그림자 속에 자신의 육체나 정신을 유폐시킨 유령처럼 떠돌아야했던 그들이. 그러나 정작 혼돈을 야기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자체가 아니라, 그들을 어떤 카테고리로든 정리하지 못해 안달하는 우리와 우리가 가진 이진법적 시스템일 것이다. 연극은 2진법의 정리 정연함 너머에 존재하는 나머지의 세계에 유령처럼 떠돌던, 남과 여라는 극단 사이에 존재할 있는 무수한 존재들을 무대 위로 불러모은다. 마치 하나의 제의처럼.


<바후차라마타> 극은 불시에 시작한다. 연극의 시작을 기다리며 웅성거리고 있는 관객들 앞에 나와 서서 자신을 연출이라고 소개하는 남자 - 실제로 그는 연극의 연출인 배요섭이다 - 연극의 시작에 앞서 객석에 약간의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본인이 남자라고 생각하세요, 여자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은 본인이 남자(혹은 여자)라고 생각하십니까?마치 열려라 참깨하고 외치는 알리바바의 주문처럼, 관객들에게 던져진 연출의 질문들을 시작으로 <바후차라마타> 객석의 관객들 앞에 새로운 사유의 장을 열어 보인다. 우리가 기존의 사유구조를 깨고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의 본질적 질문에 다가갈 있게 하는 원형의 공간을. 관객들 속에 미리 자리하고 있던 배우들은 연출의 마지막 질문을 신호로 무대로 뛰어나간다. 그들이 관객들 사이에 있다가 배우임을 커밍아웃하고 무대로 나서는 순간, 관객들은 알아챈다. 그들이 시작하려는 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그들이 사는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라는 것을. 그리고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언제 어떻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느끼고 확인하는지. 그리곤 연출의 변이 이어지는 동안 무대 뒤편으로 자신의 경대를 앞에 놓고 입었던 옷들을 훌훌 벗어 던진다. 그들이 사람들 속에 섞여 존재하기 위하여 써야 했던 무거운 가면을 벗고 본연의 돌아가는 시간이다. 트랜스젠더 앤디의 독백을 시작으로, 남자와 여자의 특징을 모두 갖고 태어난 간성(intersex) 매춘부, 호르몬 이상으로 남자처럼 털이 나는 여자 등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독백은 연극이 그들에게 부여한 목소리와 함께 각기 다른 음악과 몸짓으로 구체화되며 그들이 동안 발화할 없었던 그들의 정체성을 무대 위로 표출한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들려오던 목소리는 점차 고조되다가 어느새 한데 뭉쳐져 커다란 고함이 되어 객석으로 쏟아진다.


대우들의 목소리 뿐아니라, 역동적인 몸의 움직임으로 표출되는 <바후차라마타> 목소리들은 바흐친적 의미의 다성성을 담지한다. 개별적 주인공의 목소리는 이념과 이념을 마주하는 방식으로 진리를 시험하기 위해 모험하며, 이념을 표현하는 인간과 삶에 대한 시험을 수행할 모험은 선험적 절대좌표를 향해 달려가는 독백적 발화(monopoly) 아니다. 하나의 주인공 화자를 세우지 않고, 여러 화자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늘어놓듯 발화하기 시작한 목소리들은 한국어, 영어, 인도어 다양한 언어를 통해 전달되지만 극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감에 따라 관객과 혹은 무대 위의 다른 무리들의 몸짓, 시선 소리 없는 목소리들과 부딪히고 엇갈리며 대화한다. 그들 어느 목소리도 두드러지지 않고, 어느 목소리도 다른 목소리에 눌려 파묻히지 않는다.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다가 어느 순간 의미를 분별할 없는 동시다발적 고함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 연출은 관객들에게 고백한다. 많은 목소리들 사이에서 그가 길을 잃었음을..


  이 연극의 다성성은 분명 대립적 이념항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사람이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 규정짓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형태 의미한다는 점을 상기할 , 맡은 배역을 통하여 어떠한 카테고리로 밀어 넣을 없는 개인적 삶의 이데올로기를 표출하고 있는 배우들과, 각각의 목소리가 지닌 내러티브적 정합성 안에서 우리는 분명 연극의 이데올로기를 발견한다. 그것은 다양한 목소리가 한데 합쳐지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남자, 여자 외에 여자 같은 남자, 남자 같은 여자, 자신을 남자라고 생각하는 여자,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는 남자,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같은 남자,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같은 여자 등등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3 성들이 말하는 각기 다른 삶의 이데올로기가 부딪치고 엇갈리고 스치는 가운데, 자신의 본질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 애쓰는 개인들의 목소리들이 타자 목소리로 응축되는 것이다.  


(2014.4.8. 남산예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