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원형

진심이 승리하는 사회를 위하여 ㅡ <명량>, (김한민, 2014) 본문

빛나는 착각

진심이 승리하는 사회를 위하여 ㅡ <명량>, (김한민, 2014)

S.mi 2014. 11. 21. 17:48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는 왜 싸우시는 겁니까, 라고 묻는 아들은 자신의 목숨까지 거두려 했던 임금이 있는 도성을 지키고자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희망 없는 전장에 나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무능한 왕은 자신의 아비를 다시 버릴 것이 분명한데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끝까지 충신으로 남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버지는 아들의 질문에 대답한다. 자신의 의리가 쫓는 충은 임금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것이라고.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바로 이 아들, 회의 시선으로 김한민은 <명량>의 이순신을 우리 앞에 다시 세운다. 사실 영화에서 회의 시선은 부자지간의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한 그것 류의 시선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이순신에 대한 관객의 시선에 가깝다. 그는 그저 불가해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응시한다. 부족한 군사들과 열두 척 밖에 남지 않은 배를 가지고 바다에 나가 왜적들과 맞서겠다는 아버지의 도무지 흔들릴 줄 모르는 신념을. 그리고 참다못해 한 마디를 던진다. 건강이 좋지 않으니 이제 관직에서 물러나 쉬셔도 좋지 않겠느냐고. 관객들은 마치 아버지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는 듯한 회의 시선을 함께 쫓는다. 영화의 서사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그들은 회와 함께 이순신을 바라보고, 그의 말을 곱씹으며 회와 함께 깨닫는다. 이순신이라는 하나의 인간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영화 <명량>의 미덕이다. 


감독은 애초부터 이순신의 앞에 성웅이니 뭐니 하는 찬사를 붙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이순신의 아들인 이회에게 조차 아버지에 대하여 말할 것을 주문하는 대신,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질 것을 요청한다. 가장 친밀하다 할 수 있는 피붙이에게 조차 아버지에 대하여 함구령을 내린 감독은 오히려 영화의 초반부터 그에게 호의롭지 않은 시선들을 곳곳에 배치한다. 그리곤 그 의심스러운 시선들 속에서 의연한 척 서 있는 이순신을 보여준다. 그렇다. 의연한 이순신이 아니라 의연한 척 하는 이순신이다. 이쯤에서 하나 고백하자면, 우리는 아들인 회도 보지 못했던 이순신의 은밀한 비밀을 하나 알고 있다. 신념에 찬 모습으로 굳건하게 병사들 앞에 선 그의 몸속에 퍼져 있는 것이 병마뿐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에게도 그토록 경계해 마지않던 두려움이 독버섯처럼 퍼져 있었다는 것을. 그런 이순신의 내적 흔들림은 핸드핼드로 타이트하게 들어간 익스트림 클로즈 쇼트를 통해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클로즈업을 통해 이순신의 감정을 잡는 카메라의 미세한 흔들림은 그가 애써 감추려 했던 두려움의 존재를 내비춘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치 챌 수 있었다. 두려움에 군영을 이탈했던 군사를 처단한 그의 칼이 벤 것은 탈영병의 목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뿌리박고 점점 자라나는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왜 명량대첩의 이순신이어야 했는가? 

언론시사회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명량>은 3부작으로 기획된 이순신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그 시리즈의 후속편을 예고하듯 <명량>의 마지막 장면에는 1592년 한산도 앞바다에 나타난 거대한 구선이 모습을 드러낸다. 짧은 역사적 지식을 뒤적여 볼 때, 순서상 명량대첩(1597)보다 한산도대첩이 먼저 제작되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나 ‘불가합니다’에 ‘된다고 말하게’하고 응대했던 이순신 아닌가. 충신을 버리는 무능한 왕과 서로 제 살길만을 찾아 모래알처럼 흩어진 군사들 앞에서 스스로 두려움을 베어내고, 또한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 보인 그의 인간적 노력만큼 패배주의에 물든 지금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있을까? 아마도 그가 신념에 가득 찬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전군, 진격하라”를 외쳤다면 영화의 울림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명량>에서 본 그는, 그리고 우리가 이해한 그는 계속 벼랑 끝에 서서 흔들리는 인간이었다. 죽을힘을 다하여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짜내기 위해 애 쓰는 그의 모습을 보았기에 우리는 이제 명량해전을 진심이 승리한 전쟁으로 기억할 수 있다. 그 때문인가? <명량>에 대한 감독의 작업 방식도 진심을 넘어 우직스럽다할 만하다. CG의 스펙터클에 기대기보다는 교과서를 만들 듯 하나하나 고증해 가며 직접 판옥선을 제작하고 그것을 바다에 띄워 촬영에 임하기까지, 그의 진심은 장장 한 시간이 넘는 해상 전투 신으로 고스란히 살아났다. 그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 개봉이래 <명량>은 역대 최단 속도로 17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엄청난 기염을 토하고 있다.

 




명량 (2014)

Roaring Currents 
7.7
감독
김한민
출연
최민식, 류승룡, 조진웅, 김명곤, 진구
정보
액션, 드라마 | 한국 | 128 분 | 2014-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