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원형

아오야마 신지가 그린 일본의 자화상—“도모구이(共食い, 2013) 본문

빛나는 착각

아오야마 신지가 그린 일본의 자화상—“도모구이(共食い, 2013)

S.mi 2014. 11. 21. 17:36

❚ 3.11 이후


3.11 대지진이 일본 사회에 남긴 상처는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었다. 그날 이후 재건을 위해 2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노력해 왔지만, 단단히 덧난 상처는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고 되려 더 벌어져 고름이 차오를 뿐이다. 덧난 상처 때문에 고열로 시달리다 정신을 놓은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몇 십 년, 아니 그 몇 배 이상의 시간을 후유증에 시달려야 할지 모르는 비관적인 현실에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일본이 보이는 행보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굳이 아베 총리의 이름까지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매스컴에서 보이는 극우 세력의 광기어린 모습이나, 방사능 유출 문제에 대한 어이없는 일본의 태도는 더 이상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러한 기미는 3.11 이후 만들어진 일본 영화들에서 일찍부터 발견되었다. 대지진 이후 일본 영화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을 두 가지 꼽는다면, 하나는 가족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많아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 긍정의 태도로 사회통합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캠페인 같은 영화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3.11 이후 한동안 일본의 영화계는 마치 고통을 참기 위해 아편을 맞은 환자처럼 비실거리며 행복한 환상에 취해 있었다. 활황세였던 일본의 영화산업이 대지진 이후 위축되어 흥행수입과 관객수는 물론 스크린수까지 감소세로 돌아선 것은 사실이지만, 실의에 빠진 자국민을 위로하기 위해 무료 영화상영을 대폭 늘린 탓에 개봉편수는 오히려 늘어났다.(일본영화는 지난 수년간 활황세를 보여주었다. 2005년부터 자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급격하게 높아지기 시작했고, 개봉편수도 외화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3/11 대지진 이후 상황은 갑자기 달라졌다. 일본영화제작자연맹이 126일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1년 일본영화시장의 흥행수입은 1,8119,700만엔으로 전년대비 82.1%, 관객수는 14,4722,600명으로 83%에 그쳤다. 스크린수는 3,339개로 2010년에 비해 73개가 감소하였다. 스크린수가 감소세로 돌아선 것은 18년만의 일이다. 개봉편수는 799편으로 2010년의 716편에 비해 오히려 늘었는데, 이는 일본영화계가 실의에 빠진 자국민을 위로하기 위해 무료 영화상영을 대폭 늘린 탓이다.) 일본감독협회와 일본영화촬영감독협회 등 영화관련 단체들이 배급사의 도움을 받아 이재민 수용소 등에서 무료상영을 하는가 하면, 홈시어터 회사인 Budscene을 시작으로 많은 NGO 단체들이 무지개 시네마운동을 시작했는데, ‘무지개 시네마운동이란 영사장비를 가지고 미야기, 후쿠시마 현 등 재난지역을 돌며 무료 영화상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을 영화로 위로하겠다는 이 같은 움직임을 문제 삼자는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컨텐츠일 것인데, 이재민을 위로하고 재난으로 무너져 내린 공동체적 기반을 재건하고자하는 공동의 절실함 때문인지 이즈음 만들어진 영화들의 다수가 장르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선전영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바니드롭스처럼 만화원작의 대중 영화부터 시작해서, “진짜로 이루어질지 몰라, 기적과 같은 유명 감독의 작품이나 해피해피 브레드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와 같은 독립영화까지 사회 통합과 힐링을 앞세운 영화들이 지난 2년여 동안 일본에서 주로 제작, 개봉되었던 것이다. 사회 내부적인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런 영화들이 외부의 평가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지난 몇 년간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수입 배급된 일본 영화의 편수가 많지 않았다. 오다기리 죠가 얼마 전 인터뷰에서 대지진 이후 일본영화가 약해졌다는 평을 언급했던 것도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오야마 신지의 신작 도모구이는 무척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대지진 이후 생산된 많은 다른 영화들처럼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모르는 사이 현실을 장악해버린 환상들마저 걷어내려는 시도를 하는데, 새디즘적 취향을 가진 아버지의 피가 자신에게도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토마의 환상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영화 안에서 그 환상을 파기함으로서 관객으로 하여금 토마를 둘러싸고 있는 실재를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아름답고 정적인 풍광(여성성)과 날것 그대로 표출되는 역동적인 아버지의 욕망(남성성)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그 속에서 표출되는 토마의 내면을 다라가는 카메라의 눈은 아름답고도 충격적인 영상을 통해 관객들에게 각성을 요구한다. “영화라는 것은 현재에 대하여 늘 긍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그것은 주류 영화의 경우이고, 독립영화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라던 덤덤하게 말하던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말은 그 의미를 좀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는 지금부터 가족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그리고 역사의 이름으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그 모든 환상을 걷어내고 실재의 세계를 펼쳐놓으려 하고 있으며, “도모구이가 바로 그 내딛는 걸음의 첫 보가 될 테니까. (도모구이는 시네마스코프 촬영으로 만들어졌다. 기존 영화의 영상 비율이 1:1.33인데 비해, 시네마스코프 촬영은 2.35:1인데, 앙드레 바쟁에 의하면 이러한 와이드 스크린 촬영은 프레임에 담기는 미장센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실재를 더 잘 드러낼 수 있다고 한다.)


❚ 그 사람과 나  


영화는 1988년 쇼와 최후의 여름, 시모노세키의 조용한 강변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아버지 마도카와 그의 애인 코토코와 함께 살고 있는 토마는 17살 소년이다. 토마는 피폭으로 잃은 왼손 대신 생선손질용 의수를 끼고 강 하구에서 생선을 다듬어 파는 엄마를 종종 찾아간다. 그녀는 섹스에 집착하며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다. 강한 성욕을 가진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가학적인 섹스를 즐기는데, 집에 들인 애인 코토코로도 모자라서 아파트 테라스에 나와 앉아 있는 늙은 매춘부를 찾아가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곤 한다. 토마는 그런 아버지를 경멸하고, 아버지에 맞으면서도 함께 사는 코토코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엄마의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에게도 그런 가학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만 같아 불안하다.


토마에게는 소꿉동무인 여자 친구 치쿠사가 있다. 둘은 어른들 몰래 신사 창고에서 만나 섹스를 하곤 한다. 토마와 관계를 가질 때마다 치쿠사가 아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토마는 계속 치쿠사에게 섹스를 요구한다. 그런 자신이 코토코를 때리며 섹스를 즐기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 토마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치쿠사와의 관계를 그만둘 수 없다. 어느 날 토마는 아파하는 치쿠사의 표정을 보며 충동적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고 만다. 화가 난 치쿠사는 토마를 더 이상 만나주지 않고, 토마는 자위로도 충족되지 않는 성욕에 아버지가 자주 가는 늙은 매춘부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 역시 만족스럽지 않다. 자꾸만 토마를 거절하는 치쿠사 때문에 부어 있는 토마의 얼굴을 보며 진코는, 그의 눈빛이 욕망에 굶주렸을 때 이상하게 변하는 아버지의 그것과 닮았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가학성 때문에 엄마는 집을 나갔고, 임신을 했다는 아버지의 애인 코토코도 뱃속의 아이와 둘이 집을 떠날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며 토마는 점점 두려워진다. 자신의 욕망이 아버지의 그것처럼 비뚤어진 것이어서 자신도 아버지처럼 혼자 남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리고 코토코가 떠난 날, 코토코를 찾아 헤매다 신사에서 토마를 기다리는 치쿠사를 아버지가 강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토마는 아버지를 닮은 그 눈빛을 하고 아버지를 죽일 결심을 한다. 그런 토마를 말리며 진코는 애초에 자신이 끝냈어야 했던 일이라며 생선칼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뒤늦게 쫒아간 토마 앞에서 아버지와 몸싸움을 벌이던 진코는 아버지에게 빼앗긴 칼 대신 의수를 뽑아 아버지를 찔러 죽이고 자수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그저 비극적인 어느 가족의 이야기로만 들린다. 그러나 아오야마 신지는 이 비정상적인 가족의 잔혹사를 근대 일본에 덧씌운다. 영화에서 진코는 토마의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영화의 말미에서 아버지를 죽음 이후 자후한 그녀를 면회온 토마에게 그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특사가 있을 것이라는 뉴스를 신문에서 읽었다고 말한다. 쇼와 천황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오야마 신지는 전범이었던 쇼와 천황의 죽음과 색광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나란히 병치시킴으로서 병든 일본의 근대사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昭和시대와 平成시대의 교차점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수동적인 토마의 모습을 통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일본의 자화상을 그린 것이다.(GV에서 감독은 일본의 천황제가 일본의 약점 가운데 하나인 것은 사실이며, 보다 문제적인 것은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민당, 특히 아베라고 발언하였다. 또한 그는 앞으로 이런 자민당 정권을 지속적으로 비판해 나갈 생각이며, 그런 점에서 헤이세이의 시작에서 이야기를 끝맺은 이 영화는 그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런 점에서 마코토()를 죽인 사람이 토마가 아닌 진코(仁子)라는 설정은 주목해 볼만 하다. 토마와 치쿠사를 대신해 아버지를 죽이러 가면서 진코는 그것이 자신의 세대에서 끝냈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힘에 밀려 생선칼을 놓친 마지막 순간에 망설임 없이 하나밖에 없는 의수를 뽑아 그를 찌른다. 그녀의 의수는 생선손질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것인데, 공장이 없어져 더 이상 구할 수도 없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생계와도 직결된 그 의수를 아버지와 함께 강 속에 밀어 넣음으로서 반복되며 더욱 폭주하는 아버지를 멈춘 한 것이다. 그리고는 면회를 온 토마에게 말한다. ‘그 사람(쇼와천황)’ 때문에 생긴 의수를 그 사람(마코토)’이 가지고 간 것이라고. 진코가 전쟁의 피폭으로 왼쪽 손목을 잃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은 진코를 비롯한 전쟁세대가 청산했어야 할 전범으로서 일본의 과거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묻는다. 전후세대가 물려받은 지금의 平成시대에 청산되지 않은 쇼와의 유물이 무엇인지.

 

❚ 순환의 메커니즘(, , 여성, 그리고 역사)


토모구이는 강의 하류를 타임랩스로 촬영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변화하는 강의 모습을 빠르게 돌려보는 동안 감독은 강물이 계속해서 차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어났다 줄어들고 또 다시 불어났다 줄어드는 것을 반복하는 가운데 서서히 변화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치 역사처럼. 단순히 유수의 흐름과 시간의 흐름의 일방향성 때문이 아니라, 무수한 반복의 사이클 속에서 점차 변화시키는 역사의 모습이 강의 그것과 닮았다. 비단 영화의 첫 장면에서만이 아니라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영화의 곳곳에서 영상을 통해 일종의 순환 매커니즘을 구현한다. 그는 하나의 이미지에 상징을 부여하기 보다는 이미지의 겹침에서 생성되는 의미를 추구하는데, 영화의 순환구조는 이러한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완성된다. 목욕탕에서 자위를 한 토마의 정액이 하수구로 흘러들어가는 장면 다음에, 수채구멍에 만월(滿月)을 오버랩 시키는 방식으로 강 하류를 비춘다. 생활 오폐수가 흘러 들어왔음을 짐작케 하는 강변의 모습을 비춘 감독은 이번에는 짓궂게도 거기서 잡은 장어를 밥상에 올린다. “토모구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사이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보다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도 포착된다. 강물의 수위처럼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주기적으로 한 쇼트씩 삽입한다거나, 여성의 월경 주기와 같은 것들도 있다. 영화의 서사 안에서는 아버지와 엄마, 아버지와 코토코의 관계가 반복적인 사이클을 보인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둘째를 가진 채 집을 나간 엄마처럼 코토코도 임신을 한 후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이러한 순환의 메커니즘은 반복적 행위라는 것 외에도 다른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그것이 일 방향성을 가지고 흐른다는 점이다. 반복은 되지만, 그 반복이 똑같은 반복은 아니다. 강물이 점차 차올랐던 것처럼 늙은 여자는 월경이 점차 끊기고, 하늘에 뜬 달 마저도 매달 뜨는 보름달이 같은 거리에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의 방향으로 치우친 것들은 나름의 끝을 맺는 것이다. 역사 또한 다르지 않다. 치우쳐 흘러가는 역사는 언젠가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그것을 그때그때 바로잡지 않는다면 더 어린 여자를 탐했다가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섹스 사이클처럼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가족 내적 갈등으로 끝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뚤어진 방향으로 증폭된 그의 욕망이 맞이한 최후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균형을 잡지 못하는 일본 사회에 대하여.


그러나 그의 영화가 그러한 비관적인 사이클만을 그려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면회를 마치고 코토코를 찾아갔던 토마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치쿠사가 진코의 가게에서 그를 맞아준다. 여린 소녀였던 그녀는 부재한 토마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하여 강인한 모성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토마와 함께 누운 밤, 그녀는 목을 조르려 하는 토마의 손을 묶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토마에게 더 이상 토마와의 섹스가 아프지 않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그들의 사이클을 그들의 방식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과 상이한 영화의 마지막을 생각한다면, 감독은 처음부터 단순한 반복의 사이클이나, 가족사의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기 보다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던 그 지점으로 돌아가 상처를 치료하고 나아갈 다른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17세 토마의 1988년 여름을 서술하는 내레이션이 중년 남성의 목소리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平成25. 지금의 토마는 불혹의 나이를 지난 중년의 남성일 것이다. 그런 그가 쇼와의 마지막을 다시 더듬는 것은 어쩌면 지금 그가 서 있는 지점에서 그가 그때 봤던 쇼와의의 마지막이 자꾸만 데자뷰처럼 나타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토모구이平成가 시작할 무렵에서 끝이 난 것도 그것이 다시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昭和6417


 (미완)

(탈식민적 관점에서 본 여성성의 문제, 영화의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 솔레미오’ -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