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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부조리

S.mi 2014. 10. 22. 14:52

부조리
ㅡ 명제에 담긴 취향

                                                                          오은 詩


명색이 삼월의 햇살은,
따사로워야 한다
벚꽃은 익살맞게 한껏 흐드러져야 한다
새싹들은 느티나무의 꿈을 안고 태어나야 하고
바람은 살랑거리며 코끝을 간질여야 한다
그래야 고객들이 만족한다


자고로 벚꽃은,
소리소문 없이 우리 곁을 떠나야 한다
절정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고객들이 아쉬워한다
자신들의 게으름과 인생무상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로소 미움에 승부를 걸 수 있게 된다
미워 언제 졌지?
언제 미워졌지?
단어의 선택과 배치는 더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야만 고객들이 만족한다


인생의 덧없음을 몸으로,
인생은 덧만 없는 게 아니라
멋이나 벗 같은 것도 없다는 사실을
맘으로, 깨우쳐야 한다 삼월에는
절절히 황사가 날리고 시시로 산성비가 쏟아지므로,


꽃구경 후에 하는 식사는
응당 근사해야 한다
매운탕은 칼칼해야 한다
밥은 고슬고슬해야 한다
다음의 두 문장은 몇 번이고 반복되어도 좋다
고객들의 입맛은 까다로워야 한다
고객들은 입맛이 까다로워야 한다


어떤 명제는 계절이 바뀌면 효력을 잃는다
그리고 어떤 계절에는 이 명제가 거짓이어야 한다
따사롭다는 말은 꼭 필요할 때만 써야 한다
익살은 필요하지 않을 때조차 부리려 애써야 한다
영원이나 죽음처럼
언어의 밀도를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
내가 들어갈 여백을 최대한 넓혀놔야 한다
내가 들어갈 관은 내가 짜야 한다


다음 계절에 명제는 더 까다로워져야 한다
고객들의 입맛처럼, 한창 쇼핑을 하던 중
아득한 이의 부고를 들은 직후의 마음가짐처럼,


어떤 감정은 더 집요해져야 한다
그리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일제히 메뉴판을 노려보는 고객들의 눈빛


사월은 언제나 되거나 질어야 한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저자
오은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4-1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모든 것을 지시할 수 있지만, 어디에도 다다를 수 없는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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